결혼 - 신혼여행,국제결혼,웨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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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結婚)단어장에 추가요약
⇒ 혼인 .
설명
사회가 인정하는 절차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부부가 되는 것. 이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된 지속적인 남녀의 성적 결합이며, 일반적으로는 특정한 규범에 바탕을 둔 동거(同居)관계와 경제적 협력이 따르는 사회제도이다. 흔히 <결혼>이라는 말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혼인>은 법률용어 또는 인류학 등의 학술용어로 쓰이는데 반하여 <결혼>은 연애결혼이라는 말처럼 남녀가 부부관계를 맺는 행위 또는 결혼생활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결혼은 당사자에 관련되는 개인적 행위이지만 그 과정에서는 사회제도로서의 혼인규제에 구속된다. 즉 어느 범위의 사람과는 결혼이 허용되지 않고(外婚) 어느 범위의 사람과는 결혼이 가능하며(內婚), 결혼에 임해서는 어떤 절차와 의례가 필요한 등, 관습화된 혼인규제의 예는 어떠한 사회의 결혼에서도 무시할 수는 없다.

사회적 의미와 기능
혼인은 당사자의 인생에 관련되는 일신상의 문제인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여러 가지 중요한 뜻을 지닌다. 첫째 혼인은 당사자인 남녀에 대해 남편과 아내라는 지위를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각각 규범에 따른 권리와 의무를 부여한다. 이들 지위는 여러 사회에서 성인 즉 어른이라는 자격과 결부되므로 혼인은 지위 부여의 기능을 가진다. 둘째 혼인은 당사자간의 성관계를 특별히 인정받는 대신 혼외 성관계를 제한하고, 이 통제를 통하여 사회의 기본적 구성단위인 가족의 존립과 사회 자체의 안정에 기여한다. 셋째 혼인은 부부 사이에 태어난 자식에 대해 적자(嫡子)로서의 자격을 주는 동시에 그것에 상응하는 권리와 의무를 인정한다. 혼인관계를 가지지 않은 남녀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부모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사회나 가정에서 권리·의무상 적자와 차별받는 경우가 많다. 즉 혼인은 <사회적 부권(父權)>의 승인이라는 면에서 중요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넷째 혼인은 그 사회의 특유한 친족조직에 개인을 편입시킴으로써 조직강화와 제도유지에 기여하는 동시에 혼인관계 확대를 통해 사회 자체의 확대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였다.

혼인형태론 전개
19세기 중엽까지는 일부일처제가 예로부터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는 인류의 유일한 혼인형태로 간주되고 혼인형태가 학문의 연구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61년 스위스의 J.J. 바흐오펜이 《모권론(母權論)》에서 원시시대에는 난교적(亂交的) 성관계가 이루어져 <모권제>가 형성되었다는 학설을 제창하였다. 이어 1877년 미국의 L.H. 모건이 난교제로부터 2종류의 집단혼과 대우혼(對偶婚)을 거쳐 마지막으로 일부일처제에 도달하였다는 <혼인=가족>의 발전도식을 제시하여 비로소 혼인형태가 학문(특히 인류학)으로서 연구대상이 되었다. 모건의 혼인 발전도식은 그 뒤 인류학자에게 계승되어 이른바 진화주의학파를 형성하였으나, 19세기 말부터 이 발전도식에 의문을 제기, 반진화주의학파들이 등장해 20세기 초까지 인류학계는 <원시난교=집단혼설>의 가부를 둘러싸고 큰 논쟁이 벌어졌다. 핀란드의 E.A. 베스터마크, 오스트리아의 W. 슈미트, 영국의 B.K. 말리노프스키 등은 오늘날의 일부일처제가 원시시대 인류사회에도 있었다고 주장하여 <원시난교=집단혼설>을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오늘날에는 이 원시단혼제설(原始單婚制說)이 인류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원시난교제설(原始亂交制說)
원시시대에 난교제가 있었다는 학설은 바흐오펜의 경우나 모건의 경우 모두 가상의 이론적 추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모건은 그가 최초의 가족형태라고 본 혈연가족에서 추정하였으며 이는 조카와 아들, 백(숙)부·백(숙)모와 부모를 구별하지 않는 특수한 친족용어 체계, 이른바 유별적(類別的)인 친족체계에 주목하여 이 유별적 체계가 나타나는 사회에서는 과거에 일정한 <집단혼>이 존재하였다고 여겨 그 유별적 친족체계 분석에서 <혈연가족>과 <푸날루아(punalua) 가족>이라는 두 단계의 집단혼을 상정하였다. 그리고 혈연가족에서는 같은 세대의 남녀가 서로 집단적인 결혼을 하였으나, 세대가 다른 남녀 사이에는 결혼이 금지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같은 세대인 한 사회의 모든 남녀가 집단적으로 결혼한다는 이 집단혼 형태는 실제로 같은 세대 남녀 사이에 난교적인 관계가 전개되었음을 뜻하므로, 이 혈연가족 이전 단계에서는 세대의 장벽 없이 사회의 모든 남녀가 무차별적으로 성관계를 가지는 일반적인 난교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모건 이후 진화주의 인류학자는 모건의 원시난교제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문명사회에서의 방종한 성풍습을 경쟁적으로 들어 원시시대의 난교 유습이라고 간주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서아시사에서 인도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하였던, 여자가 일생에 한 번 특히 결혼 전 신전·사원에서 매음하는 종교적 매음 습속, 신부가 첫날밤 신랑 이외의 남성과 동침해야 하는 초야권(初夜權)과 비슷한 습속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원시난교의 유습으로 여겼던 이들 습속에 대해서도 그 뒤 인류학에서 다른 해석을 제시하여 원시난교유습제설의 타당설은 부정되었다. 원시난교제설에서의 치명적인 단점은, 아무리 원시적인 미개민족에서도 언제나 사회적으로 통제된 혼인제도가 존재하였으며, 난교제를 시행하면서 살아온 민족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원시사회 혼인
집단혼에 관해서도 모건이나 진화주의 인류학자들이 상정한 형태의 것은 오늘날 부인되고 있다. 모건이 옛날의 집단혼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로 간주하였던 <유별적> 친족 명칭 체계에 대해서는 그 뒤 많은 다른 해석이 시도되어, 집단혼적 해석은 부처(夫妻) 명칭을 제외하고는 지지받지 못하게 되었다. 미개민족에서 간혹 발견되는 집단혼적 습속도 모건이 상정하였던 것과 달리 남편들 중에는 <주된 남편>과 한 사람의 <주된 아내> 관계를 핵심으로 구성된 것이라도 제3자의 개입을 모두 배제하고, 제3자의 관여를 간통으로 범죄시하는 관념을 가지고 있으나, 원시사회 혼인에서는 가령 그것이 한 사람의 <주된 남편>과 <주된 아내> 이외의 사람에게 개방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남편 명칭이나 아내 명칭이 <주된 남편>의 형제 또는 4촌 형제, <주된 아내>의 자매 또는 4촌 자매로 유별화되어 있는 곳에서는 <주된 남편>과 그 <아내> 명칭으로 불리는 처형·처제들과의 사이나, <주된 아내>와 그 <남편> 명칭으로 불리는 시아주버니·시동생들과의 사이에 일종의 성적 특권관계가 존재하였다. 영국 인류학자 R. 브리폴트는 이처럼 유별화된 남편 또는 아내 명칭에 <성적 접근의 권리>가 내포된 것이라 보고 이른바 자매형 일부다처제며 형제형 일처다부제 또는 소로레이트(sororate)혼, 그리고 레비레이트(levirate)혼을 이 <성적 접근의 권리> 구현으로 보았다. 또 에스키모족에서 보이는 손님에게 아내를 제공하는 <대처(貸妻)> 관습도 같은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요컨대 원시사회 혼인은 그것이 <주된 남편>과 <주된 아내>라는 1남 1녀의 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것일지라도 집단적 성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 집단적 성의 계기를 통하여 일부다처제·일처다부제 그리고 집단혼 등 다양한 복혼적(複婚的) 습속을 파생시켰다.

복혼
복혼(polygamy)은 당사자의 한쪽 또는 쌍방이 복수인 결혼의 여러 형식을 총괄하여 일컫는 말이다. 한쪽 당사자만 복수인 결혼에는 일처다부제(polyandry)와 일부다처제(polygyny)가 있고, 쌍방의 당사자가 복수인 결혼은 집단혼(group marriage)이다.

일처다부제
남편들이 서로 형제인 <형제형(型)>과 <비형제형>인 2가지 형태가 있으나, 형제형이 일반적이다. 복수의 남편이 아내를 공유하며 남편들 사이에 <주된 남편>과 <부차적인 남편>의 구별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으며, 형제형에서 일반적으로 주된 남편은 맏형이다. 일처다부제가 생긴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예를 들면 여자아이 살해 습속 등에 의해 여자가 일찍 죽어 혼인적령기 남녀 사이에 인구상 불균형이 생긴 때문이라든지, 신부 대가(代價)가 많이 들어 혼자서는 마련할 수 없어 형제가 공동 조달하여 공동의 아내를 맞는다든지, 또는 가산불분할(家産不分轄) 규범이나 농경과 목축의 겸업을 효과적으로 경영하려는 조건에서 형제가 협력해 하나의 세대를 가지기 위해서 등의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일처다부제 아래에서는 생리학적으로 부자관계가 분명하지 않게 되는데, 각 부족에서는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부자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주된 남편(맏형)만 부성(父性)을 인정받거나, 남편들에게 차례로 부성을 인정하거나, 아내의 지명에 따라 남편들 중에서 아버지가 그때마다 정해지기도 한다.

일부다처제
아내들이 서로 자매 사이인 <자매형>과 <비자매형>으로 나뉜다. 자매형에서는 맏언니가 한 남자와 결혼하면 그 이하가 모두 그 남자의 결혼요구를 받거나 기대할 수 있다. 비자매형에서는 다수의 아내(또는 첩)를 거느리는 게 사회적으로 허용될 뿐 자매형과 같은 요구 또는 기대는 따르지 않는다. 원시사회에서는 이 두 형태가 모두 있었으나 고대 이후 문명사회에서는 자매형이 현저히 감퇴하고 비자매형이 일반적이 되었다. 또한 일부다처제가 복혼의 지배적 형태를 이루므로 본래 <복혼>을 뜻하는 폴리거미는 일부다처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같은 일부다처제라도 아내들의 신분 위치에 따라 여러 형태가 나타나는데 신분이 서로 동등한 경우, 주된 아내 즉 적처(嫡妻)와 부차적 아내가 구별되는 경우가 있고, 또 아내와 첩으로 명확히 구별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 아내와 첩의 신분적 차별이 설정되어 있으면서도 아내가 단지 1명만 있는 경우 남자가 복수의 여자를 거느린다는 점에서 일부다처제라고 인정할 수 있는 동시에, 단 1명의 아내만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일부일처제로 간주할 수도 있다. 문명사회의 지금까지의 일부일처제도 그것이 첩을 거느리는 것을 사실상 묵인하는 한에서는 실제로는 일부다처제의 성격을 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일처제
일부다처제는 고대문명 초기단계에서 가장 성하였다. 이 단계에서는 여성 지위가 매우 낮아 아내는 단지 노동 수단으로 취급되었고, 혼인은 신부 매매라는 매매혼(賣買婚) 형식이었다. 당시 가난한 남자는 한 명의 아내를 맞는 것만으로 만족하였지만 재력이 있는 남자는 경쟁적으로 많은 아내를 거느렸다. 아내가 많은 것은 재력과 지위 과시의 상징으로 여겨, 아시아·아프리카의 전제군주나 토후(土侯)들은 많은 아내들이 거처할 거대한 할렘을 짓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부다처제가 아시아·아프리카에서는 후대까지(일부 국가에서는 오늘날까지) 유지되었으나 유럽에서는 고대 단계에서 이미 일부일처제로 옮겨간 계기는 M. 베버에 의하면 재산지참제 도입에 있었다. 본래 고대 초기단계에서 처는 돈을 주고 사야 했고 그 지위는 노예와 거의 같은 정도로 낮았는데, 부유한 사람들은 딸이 그런 비참한 처지에 출가하는 것을 싫어하여 지참재산을 신랑집에 주는 조건으로 딸이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적처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그 자녀도 적자로서의 지위를 얻도록 요구하였다. 이런 지참재산과의 교환으로 적처신분을 보장하는 혼인계약을 통하여 일부일처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부일처제는 적처가 한 명이라는 뜻에서의 일부일처제였으며, 남편이 다른 여자를 첩으로 거느리거나 다른 여자와 혼외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남편은 재산을 지참한 한 여자에게 적처 신분을 보장하는 이상, 따로 첩을 두거나 성관계를 갖는 것은 본래의 혼인계약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명시대의 일부일처제는 이처럼 일부다처제 성격을 지녔다.

유럽의 혼인형태와 역사


고대
게르만민족이나 앵글로색슨민족의 고대 유럽사회에서는 강한 혈연사회를 구성하고 있어 혼인을 혈연의 재생산 계기로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혼인은 두 혈연집단간의 약속, 즉 혼인에 합의하는 여자쪽 혈연집단과 신부 대가, 기타 약정사항 이행을 보장하는 남자쪽 혈연집단 사이에 이루어지는 약속으로 보았으며 혼인하는 당사자의 의사는 중요시되지 않았다. 신부대가는 앵글로색슨사회 후기에 딸을 양육해 온 데 대한 보상으로 이해되었으나, 전기에는 딸의 아버지 또는 보호자로부터 신랑에게 신부에 대한 권한(mundium)을 이양하는 데 대한 보상으로 여겼다. 이들 고대의 혼인에서는 혼인을 적법화하기 위해 아버지가 딸에 대한 법적인 권한을 신랑에게 양도하고, 신랑은 그것을 취득해야만 하였다. 그 뒤 그리스도교 지배가 점차 민중의 사회생활에 침투함에 따라 혼인에 그 규제가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남편과 아내를 중심으로 하는 개별적 혼인관에 바탕하고 있었으므로 고대 유럽사회의 단체적인 혼인관과 서로 맞지 않아 그리스도교가 민중의 혼인을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교회가 혼인에 대한 지배를 확립하려면 여러 부족의 혼인관습이나 형성중이었던 봉건법을 동시에 수용하는 폭넓은 기준을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교회는 혼인을 성사(聖事;sacrament)라 하였고, 혼인에 의해 남자와 여자는 신(또는 신의 교회)과 계약을 맺고 죽음으로 이별하기까지 평생 결합된다는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 교회 지배 아래 두었다. 11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교회재판소를 설치하여 혼인사건을 이곳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기존 재판소도 독자적으로 혼인에 대해 일정한 법적 효과를 부여하는 요건을 정하고 있어 교회법상 유효한 혼인과 세속법상 적법인 혼인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중세 이후
중세 유럽의 혼인은 궁정에서의 기사들 연애이야기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이 기사도는 봉건제도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요소였는데, 그들의 연애는 기사와 귀부인으로 구성되는 상류계층의 혼인 습속이나 로맨스를 문학적인 시나 노래로 과장하여 읊은 것이다. 게다가 그 배후에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남자에 대한 여자의 예속이라는 사회관계가 숨겨져 있었다. 중세에도 혼인 때의 관심은 과부재산 또는 혼인 때 가져오는 재산, 재산 소유권, 채무변제 등에 두었고, 특히 혼인으로 새로이 형성되는 가족의 경제적 보장에 유의하였다. 가족 대부분의 재산은 남자 가장의 소유가 되어, 아내가 부동산을 혼인 전부터 가지고 있었거나 또는 혼인중 취득하더라도 그 부동산은 남편의 관리 아래 들어갔다. 아내가 남편 사후 생존하는 경우 아내에게 과부재산이 주어지지만 그것도 남편 생존 중에는 완전히 남편 권한이었고, 아내가 혼인 때 지참하는 재산이나 기타 장신구도 마찬가지였다. 중세에는 혼인을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통일적 기관이 없어 혼인의 정신적 측면은 교회법, 물질적 측면은 세속법에 의해 규제되었다. 중세의 영국 농촌사회에서는 교회에 의한 혼인과 세속 관행에 의한 혼인이 일치하지 않았다. <토지가 없으면 혼인도 없다>고 할 만큼 토지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혼인 결정은 토지를 소유하는 쌍방의 아버지 사이에서 맺어지는 동시에 혼인 당사자 사이에서는 세속상의 의식이 따르는 부부의 결속에 의해 부부생활이 시작되고,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 교회예식이 거행되었다. 혼인은 오늘날처럼 엄격한 의미를 가지지 않았고, 약혼과 혼인의 구별도 명확하지 않아 약혼은 혼인과 거의 비슷한 효력을 지녔다. 혼인 때 참작되는 것은 신분의 동일성과 애정 외에도 당사자에게 재산이 많으냐 적으냐 등 여러 요소가 있었다. 좋은 결혼을 하기 위해 남자의 경우 연령·신분이 자기와 균형을 이루고 재산을 지닌 신부를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1563년 트리엔트공의회(公議會)에 의해 교회는 혼인방식을 확립하고 혼인을 승낙행위에서 요식행위로 바꾸었다. 즉 혼인이 유효하게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제 외에 2∼3명의 증인 입회 아래 교회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여야 하며, 혼인 성립의 증거로 사제는 신랑·신부 및 증인의 이름과 혼인 체결 일시·장소를 등록부에 기재·보관하도록 하였다. 중세 말기에는 교회와 국왕 사이에 혼인 관할에 대한 싸움이 벌어져 여러 프로테스탄트(개신교) 국가에서 국왕측이 승리하자 혼인이 국왕 관할 아래 들어갔다. 남녀의 결합관계가 적법화되려면 교회에서의 예식 거행 여부와 관계없이 혼인은 국왕이 권한을 부여한 사람에 의해 등록되어야 하며, 또한 등록료 납입을 하도록 하였다.

민사혼(民事婚)의 성립
17∼18세기 유럽사회에서의 혼인은 성사(聖事)에서 계약으로 변해갔다. 그 까닭은 프랑스혁명에 의해 혼인의 성사성(聖事性)을 거부하고 민사혼주의를 확립한 외에 18세기 자연법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연법사상에서는 혼인을 자연법상의 계약인 동시에 민사상의 계약이며, 성사는 먼저 있었던 이들 계약을 재현하는 형식에 지니지 않는다고 간주하였다. 따라서 혼인에 있어 성사와 계약은 별개의 것으로 남자와 여자는 한편에서는 민사상의 효력에 의해,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의 은총에 의해 맺어지게 되었다. 혼인 중에서 관념적으로 구별되었던 이 2가지 요소는 프랑스혁명시대에 분리되었다. 1791년 9월 3일의 혁명헌법 제7조에 의해 <법률은 혼인을 민사계약만으로 인정한다>고 선언하여 종교혼주의를 배척하고 대신 민사혼주의가 확정되었다. 그 뒤 유럽사회에서 혼인은 순수하게 민사적 행위가 되었고, 19세기에 들어서자 프랑스를 비롯한 근대 민법전 속에 차례로 법률상의 혼인 성립요건이 규정되었다.

여러 민족의 혼인형태와 역사


이슬람사회
혼인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법은 이슬람법의 핵심을 이루며 이슬람사회 밑바닥에 깊이 침투해 있다. 이슬람 이전 시대에는 여자의 지위가 아주 낮았고, 남자는 여러 여자와의 결혼이 무제한 허용되어 군혼(群婚)·약탈결혼·매매혼 등이 행해졌다. 이슬람성립 이후 <4인처(四人妻)> 규정이 등장하였는데 이 4인처 문제에 대해서는 이슬람 이전의 무제한적 다처제를 4명까지 제한적으로 규정하였다는 다수의 호교론적 학설과, 이슬람 성립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도리어 다처제를 권한 장려적 규정이었다고 보는 소수의 학설로 나뉜다. 4인처에 관한 규정은 코란 4장 3절의 <만일 너희가 고아를 공평하게 취급하기 어렵다고 염려하거든 마음에 드는 여자를 2명이나 3명 또는 4명을 아내로 삼아라. 만일 아내를 공평하게 취급하기 어렵다고 염려하거든 1명만 취하라>라는 구절에 바탕을 두고 있다. 코란에 있는 4인처에 대한 계시는 625년의 우프드싸움 직후에 내려진 것이다. 이 싸움에서 많은 미망인과 고아가 발생하였고, 이들에 대한 구제는 당시의 긴급한 사회문제였다. 따라서 4인처에 규정은 다처를 제한하려는 의도였다기보다 패전 후 여성인구 과잉에 대한 해결, 무력에 호소한 초기의 포교정책과 관련된 인구 증가책의 일환으로 규정된 듯 추정된다. 그 뒤 시대에도 실제로 아내를 둘 이상 가진 예는 한정되어 있었고, 그런 경우에도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2명까지였다. 이슬람사회에서는 혼인을 알라신의 명령이라고 하여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동지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여자는 비(非)이슬람교도와의 결혼이 금지되었고, 남자는 계시된 민족인 유대교도·그리스도교도와는 통혼이 허용되었다. 직계존속과 비속, 직계존속 아이들, 부모의 모든 직계비속과의 혼인은 금지하였으나 사촌끼리의 결혼은 장려하며, 현재도 사촌끼리의 혼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다. 결혼은 후투바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다. 결혼은 후투바(khutūba) 또는 아크드 알키타브('aqd al-kitāb)라 불리는 결혼계약에 의하여 법적 구속력을 가진다. 계약에 앞서 먼저 신부·신랑의 어머니들 사이에 여러 조건에 대한 절차가 결정되고, 신부의 아버지·신랑·두 집안 증인 등 남자들 입회 아래 계약문서가 만들어지고 여기에 신부·신랑·증인·결혼등록인(ma'dhūn), 때로는 재판관이 서명한다. 작은 마을에서는 결혼등록인 대신 혼인수속에 익숙한 장로(kubār)가 서명하는 경우도 있다. 계약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남자가 여자에게 지불하는 혼수금인 마흐르(mahr) 액수와 그 지불방법이다. 마흐르액수는 신랑과 신부의 혈연관계가 멀수록 많아진다. 마흐르에는 일족의 결혼보장금과 이혼보험금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불방법은 결혼 때와 이혼 때로 나뉘며 이혼 때의 액수가 더 많이 설정된다. 수니파·시아파도 결혼이 하나의 계약이라는 사고방식은 같으며 4인처 및 기타에 관해서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시아파에서 인정하는 일정한 혼인 기간을 제한하여 계약하는 일시혼(一時婚;mut'a)에 비하여 수니파에서는 이를 금지하고 있다. 마흐르에 대해서도 계약하는 것은 여느 혼인과 마찬가지이다. 일시혼은 대상(隊商)들에게 허용된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 이란 등에서는 미망인 구제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인도
대다수 인도인들은 종교적 규범에 따라 혼인을 하는데 힌두교도들에게 혼인은 매우 큰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혼인은 <삼스카라(Samskāra;淨化法)>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자와 수드라(sūdra;노예계급)에게는 유일한 정화법이다. 정화법이란 현세에서 종교적 죄를 감소시키거나 그것을 제거하는 정화 의식이며, 혼인에 의해 태어난 아이는 선조의 제사를 이어받고 선조로부터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부채>를 갚는 사람이다. 이런 혼인 의식을 사프라파디(saprapadi)라고 하며, 성화(聖火)를 켜고 만트라(眞言)를 낭송하는 가운데 신부와 신랑이 함께 7발짝 걸어 나갔을 때 혼인이 성립된다. 혼인이 성립된 뒤에는 무효로 하거나 해소시킬 수 없다. 배우자의 죽음에 의해서도 혼인은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과부의 재혼은 허용되지 않으나 남편은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여자와 혼인할 수 있고 그 수에 제한이 있어 배우자는 ① 같은 카스트(계급)에 속하고 ② 다른 코트라(씨족) 출신이라야 하며 ③ 사핀다(sapinda)라는 근친자는 피하는데 그 범위는 자기를 포함하여 부계 5대, 모계 3대로 거슬러 올라간 사람으로부터 태어난 자손을 가리킨다. 그 밖에 북인도에서는 같은 마을 사람과는 혼인하지 않는 등 각 지방 고유의 카스트 관습이 있다. 혼인 형태는 고전에 8종류를 들고 있으나, 오늘날에는 브라흐마(Brāhma)혼이 일반적이다. 여자가 결혼하지 않은 것을 집안의 수치로 여겨 초경(初經) 때까지는 결혼시키는 것이 관례였고 유아혼(幼兒婚)이 많았다. 이같이 여자의 지위가 낮아 남편의 유해와 함께 아내가 산채로 화장되는 <사티(sati)>라는 순사(殉死), 혼인 때 신부집에서 신랑집에 지불하는 많은 지참금, 어릴 때 남편이 죽은 뒤 처녀인 채 과부로 일생을 보내는 생활 등 여러 가지 악습을 낳았다. 19세기 이후 이들 악습을 개혁하는 운동이 일어나 1829년 <사티> 금지, 1856년 과부 재혼 용인, 1929년 유아혼 금지 등 법률이 제정되었다. 1930년대에는 여성의 법적 지위향상을 강력히 제창하여 힌두법 개혁 논의가 시작되었고 독립 후인 1955년 <힌두혼인법>에 의해 달성되었다. 이 법률은 남녀평등 원칙에서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일부일처제를 확립하며, 카스트에 따른 혼인 제약을 없애고 혼인의 무효와 이혼 등을 인정하였다. 그 뒤 1973년 혼인연령을 남자 21세, 여자 18세로 높이고 1976년 이혼 요건을 완화하여 협의이혼도 인정하였다.

중국
근대화 이전의 중국에서 혼인은 일부일처다첩제(一夫一妻多妾制)였다. 아내는 남편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배우자로 남편과 일체가 되어 남편의 선조에게 제사지내며 남편의 자손에 의해 제사받게 된다. 가산(家産)에 대해서도 남편이 죽은 뒤 남편의 인격을 대표하여 망부에게 속하였던 것 모두를 그대로 계속 소유한다. 첩은 본처와 동격의 지위는 가지지 못하지만 제도적으로 인정된 규방의 반려자로, 일상생활에서는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된다. 누구라도 동시에 2명 이상의 정처를 가지는 일은 허용되지 않으며, 첩은 재력이 허락하는 한 둘 수 있었다. 처의 자녀도 첩의 자녀도 일률적으로 남편의 자녀로 취급하여 가산에 대한 권리에서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처·첩 외에 다른 여자와 비밀로 정을 통하는 일은 간음으로 지탄받았다. 혼인 성립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절차는 혼약이며, 혼약에 의해 혼인계약(부부의 인연)은 이미 성립되고, 결혼은 거기에서 당연히 귀결되는 이행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혼약은 부모가 결정하고 당사자는 결혼 때까지 서로 얼굴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혼인을 결정하는 부모 또는 부모 대리가 친족을 법률에서는 <주혼(主婚)>이라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중매인이 있어서 두 집안 사이를 주선하고 혼약 성립의 증인이 되었다. 혼약은 혼서(婚書)라는 서면 교환·예물 교환·주연(酒宴) 등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성립되는데, 그 성립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남자쪽에서 약혼자 집에 빙재(聘財;약혼자에게 보내는 예물과 현금)를 보내는 것이 보편적인 관습이었다. 빙재를 주고 받는 일은 혼약 성립의 확실한 증거인 동시에 남자쪽이 지불하는 신부대가라는 의미도 있었다. 여자쪽에서는 보통 빙재에다가 자기 집에서의 지출을 보태어 지참재산으로 가져 가게 한다. 지참재산은 부부 특유의 재산이 되며 남편 형제를 포함한 가산에 혼합되지 않는다. 결혼은 신랑집에서 꽃가마를 보내 신부를 맞아옴으로써 성립되었다. 뒤따르는 혼례와 연회는 그 집안의 빈·부에 따라 달랐으나 꽃가마 행렬은 필수적이었다. 혼례에 종교의 성직자가 관여하는 일은 없고, 또한 나라의 호적등록도 혼인의 성립 자체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어린 딸을 혼약과 동시에 남자집 양녀로 주는 일이 있었는데 이 딸을 <동양식(민며느리)>이라고 하였다. 이 경우 남녀가 성장하여 혼인 가능한 연령에 이르러 다시 예식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부모 지시에 따라 부부생활로 들어가는 게 보통이었으며 중류 이하 계층에서 많이 행해졌다. 한편 데릴사위는 동성불혼·이성불양(異姓不養)이라는 양면의 규범이 있어 정상적 제도로 받아 들여질 수 없었으나, 남편이 아내의 부모와 햇수를 정하거나 또는 무기한 동거하는 형식의 혼인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근대적 혼인법이 최초로 성립된 것은 1931년 중화민국 민법 친속편(親屬篇)에 의해서였으나 당시의 국민당 치하에서는 거의 실효성을 가지지 못하다가, 1950년 혼인법을 제정하여 이를 실시하였다. 이 혼인법은 결혼과 이혼의 자유, 일부일처제, 남녀권리 평등을 기본으로 하고 가부장제 아래의 강제적 결혼, 중혼(重婚), 축첩 동양식(민며느리제도), 과부 재혼, 자유에 대한 간섭은 엄중히 금지하였으며, 결혼 등기제도를 새로 도입하였다. 1981년 혼인법을 일부 수정한 새 혼인법이 실시되어 결혼연령을 남자 22세, 20세로 규정, 산아제한을 의무화시키고 있다.

한국의 혼인형태와 역사
혼인풍습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자료인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삼국시대 이전부터 일부일처제였으며, 모처·부처제(母處·父處制) 거주규정을 가졌다. 따라서 아들과 딸을 대등하게 취급하는 혼인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이 삼국시대에도 계승되었다. 한편 사회가 점차 계층화되면서 상류사회·귀족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성행하였다. 또한 삼국시대 왕실에 근친혼이 많았던 것을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신라 상대(上代)의 왕실에서는 모두 10건의 근친혼이 있었고, 중대의 김씨 왕실인 지증왕(智證王)계에는 3건의 근친혼이 있었다. 이것은 고려왕조에도 이어져 전고려사를 통해 63건의 동족혼이 있었다. 근친혼을 금하기 시작한 것은 정종 이후로 1046년(정종 12) 왕은 대공친(大功親;4촌간)을 맞아들여 낳은 자녀는 벼슬을 못하게 하였다. 1085년(선종 2) 금혼 범위를 이복형제로 하고 그들 소생은 벼슬을 못하게 하였으며 1096년(숙종 1) 금혼 범위를 소공친(小功親;6촌간)으로 넓혔다. 혼인제도에 큰 변화를 준 것은 고려 중기 조혼풍속으로 이는 원(元)나라 침략으로 공녀(貢女)제도가 생기면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보다 더 큰 변화는 고려말기의 주자학 전래와 이에 따른 명률(明律)의 보급으로 혼인규정에서도 동성동본금혼제도가 이때 도입되어 그 뒤 정착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양반·중인·상민·천민 등 신분이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통혼은 피하게 되었다. 양반사회에서는 가문 사이의 사회적 지위나 권세에 따라 배우자를 구하였으며 더욱이 정치상으로 대립되는 당파 사이에서도 통혼을 피하였다. 권세와 부를 지닌 상류계층에서는 일부일처다첩제가 관행으로 행해졌으나 일반적으로는 결혼 후 부처거주혼(父處居住婚) 형식을 취하였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는 사위를 맞아 아들로 삼는 데릴사위 풍습이 있었고 또 약혼한 어린 여자를 맞아 성장한 다음 결혼시키는 방법도 취하였는데 이것은 노동력을 보충하고 결혼 비용을 절약하기 위한 편법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가부장권 강화와 더불어 조혼·중매혼이 성행하였으며 전통적 혼인제도로 여겨지는 중매혼은 조선 중기 이후에 성립되었다. 전통적 혼인방식인 중매혼은 중매인의 주선에 의해 신랑·신부 양가 부모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신랑쪽에서 청혼서와 신랑의 생년월일을 적은 사주(四柱)를, 신부쪽에서는 허혼서와 결혼일자를 정한 택일(擇日)을 보낸다. 그 뒤 신랑쪽은 신부의 옷감, 귀금속 장신구, 신부의 부모·존속친(尊屬親)의 옷감 등 채단(采緞)과 혼서지(婚書紙)를 넣은 함(函)은 <함진아비>를 통해 신부집으로 보내는 동시에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는데, 이것을 초행이라 한다. 혼례는 신부집에서 치른다. 예식은 대례상(大禮床) 앞에서 주례에 의해 진행되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차려입은 신랑과 칠보족두리를 쓴 신부가 서로 맞절한 뒤 술잔을 나눈다. 예식을 마친 날 저녁에는 신부쪽 동네의 청년이나 인척 젊은이들이 찾아와 신랑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이른바 동상례(東床禮)를 치르는데, 이때 그들은 신랑에게 짓궂게 애먹이는 습속이 있다. 신랑은 신부집에 머무르다가 3일째 되는 날 신부는 꽃가마, 신랑은 말을 타고 신랑집으로 가는데 이를 신행이라 한다. 신랑집에 도착하면 신부는 시부모에게 폐백(幣帛 : 닭·대추·포 등)을 드리고 처음으로 큰 절을 올린 뒤 근친들에게도 절을 한다. 이러한 전통적 혼인제도는 일제강점기에 얼마쯤 변화를 겪으면서도 존속되다가 해방 뒤 일부일처·남녀평등·자유연애 등에 바탕한 근대 혼인법의 공포·실시에 다라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따라서 근래에 한국에서 이런 전통식 혼례는 거의 없어지고 대신 예식장·교회 등에서 행하는 신식 또는 그리스도교식 혼례가 정착하고 있으나, 사주·택일 및 혼수감을 넣은 함 보내기와 혼례 때의 폐백 등 전통적 풍습은 간략화되어 남아 있다. 한편 민법의 혼인 관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제809조 동성혼 등의 금지 조항은 1997년 7월 16일 헌법재판소 판결에서 헌법불합치(憲法不合致) 판정을 받음으로써 당해 조항의 적용이 중지되었다. 당해 조항은 입법자가 1998년 12월 31일까지 개정하지 아니하면 1999년 1월 1일 그 효력을 상실하기 때문에 당해 조항의 개정을 두고서 동성동본 금혼 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는 쪽과 제도 자체의 폐지를 주장하는 쪽 사이의 논란이 계속되었으며, 최근 양자를 절충하는 근친혼 등의 금지 조항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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