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협상 - 유석현,엄항섭,송남헌,김구,김두봉,김규식,안재홍,배성룡/한국독립당


남북협상 - 유석현,엄항섭,송남헌,김구,김두봉,김규식,안재홍,배성룡/한국독립당




남북협상 (南北協商)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노선에 대항하여 1948년 4월 19일부터 30일까지 56개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평양에서 열린 일련의 정치회담. 설명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노선에 대항하여 1948년 4월 19일부터 30일까지 56개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평양에서 열린 일련의 정치회담. 1947년 5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하여 제2차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는데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국제연합으로 이관하였다. 1948년 1월에 국제연합은 국제연합임시한국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했으나 이들의 북한방문 요청이 소련과 북한에 의해 거부되어 남북을 통한 통일선거실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남한에서는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하는 이승만(李承晩) 계열과, 남한단독정부의 수립은 국토의 영구분단과 민족분열을 초래한다는 주장을 펴는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계열로 국론이 양분되었다. 같은 해 2월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과 김두봉(金枓奉)에게 남북요인회담의 개최를 요망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회답을 받지 못했다. 2월 26일 국제연합소총회는 <총선거는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 추진한다>는 방안을 표결에 붙였으며, 31:2로 가결되어 한국의 분단은 고정되었다. 그 뒤 북한은 3월 25일 평양방송과 서신을 통해 북한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 제26차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알려 왔다. 즉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남한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사회단체와의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조선의 민주주의독립국가 건설을 추진하는 것을 공동목적으로 하자는 내용을 결의한 것이다. 북한은 이 서한을 민족자주연맹·한국독립당·남조선노동당 등 17개 단체와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단체 및 김구·김규식 등의 15명에게 전달했다. 국내의 여론이 단독정부수립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갈라져 들끓는 가운데 남한에서는 김구·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 이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대표들과 원세훈(元世勳) 이하 민족자주연맹대표단, 민주독립당의 홍명희(洪命熹) 등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제정당 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는 <삼천만 동포에게 호소하는 격문>을 채택, 16개 정당대표와 40개 단체대표가 서명하였고, 미·소 양군의 즉각 철군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양국에 전달할 것을 결의하였다. 4월 27일에는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金朋濬)·이극로(李克魯)·엄항섭(嚴恒燮)·김일성·김두봉·허헌(許憲)·박헌영(朴憲永)·최용건(崔鏞健)·주영하(朱寧河)·백남운(白南雲) 등 15명으로 구성된 남북요인 회담을 개최하고 남북통일정부수립방안에 관한 성명을 채택했다. 이어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명의 <4김회담>이 이루어졌는데, 여기에서 남한측은 ① 연백평야(延白平野)에 공급하다 중단된 수리조합 개방문제 ② 남한으로 공급하다 중단한 전력의 지속적인 송전문제 ③ 조만식(曺晩植)의 월남허용문제 ④ 만주 뤼순[旅順(여순)]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유골을 국내이장하는 문제 등을 제의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①·②항은 수락하고 ③·④항은 뒤로 미루었는데, 김구와 김규식이 서울로 돌아와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발표한 며칠 뒤, 다시 수리조합의 개방과 전력송전은 중단되었다. 결국 남북협상은 성과없이 막을 내렸고, 이 후 대한민국정부수립과정에서 이들 통일정부수립노선을 택하였던 인사들이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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